나의 이야기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도종환)

ys형님 2015. 3. 7. 20:16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도종환)



아기의 웃는 얼굴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아무런 욕심도 티도 없는 얼굴,

흠도 죄도 모르는 뽀얀 얼굴로 웃고 있을 때

그 무구한 모습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노란 산국 위에 앉았다 발에 향기를 묻힌 채

어깨 위로 날아와

날개를 흔드는 고추잠자리,

그 위에 가을햇살이 다사롭게 내려와 있을 때,

가을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평소에 늘 존경하고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손수 쓴 짧은 편지가 든

우편물을 받았을 때, 그가 쓴 글씨체까지

가슴에 정겹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을 때,

라디오를 켜는 순간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올 때,


제임스 골웨이의 플룻에 맞춰 부르는

끌레오 레인의 허밍이나

장 필립 오든의 ‘일생’같은 첼로음악을 만났을 때

음악이 끝나고 나면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러 갔다가

친절한 사람을 만났을 때,

친절하고 능력이 있으며, 고마워하는

나보다 더 밝고 환한 얼굴로

서서 인사하는 모습을 대했을 때 기쁨은 오래간다.


물을 찍어 얼굴 여기저기를 닦느라

연신 고개를 흔드는 어린 토끼의 모습,

바람에 잎을 뒤집으며 빈 하늘에

점묘의 붓을 찍는 포플러나무들의 행렬,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의사의 얼굴,

자상하게 병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환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의사의 진지한 눈,


고갯길을 돌아서는데 혼자 피어 있는 상사화,

장식품처럼 잘 다듬어져 있고

귀여운 모습을 지녔으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산속에

조용히 피어 있는 들꽃 한 송이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비 그친 뒤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는

골안개의 아름다운 비행,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비안개를 따라

드러나는 능선이 그리는 아름다운 한 폭의 담채,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착한 일을 해오다가

우연히 드러나 알게 된

어떤 사람의 선행, 기도 중에

복잡한 많은 상념들이 생기고

가라앉기를 되풀이하다

‘감사하며 살아라, 믿으며 살아라,

사랑하며 살아라’, 복잡한 대수방정식이

간단한 공식으로 정리되듯

그렇게 몇 마디 말로 함축되어 가슴에 자리 잡을 때

우리의 마음은 고마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는 병아리들의 고운 발,

그 발로 땅을 밟으며 걸어가는 대견한 몇 발짝의 걸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인데도 그 능력을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차지하는데 쓰지 않고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가진 것을 나누게 하는 일에 쓰는 사람의 일하며 사는 모습,


골짜기 바위틈에서 시작하는 석간수 맑은 물,

그 물을 작은 바가지로 떠서 마셨을 때,

곱게 늙으신 노인의 얼굴,

그가 살아온 삶과 마음가짐이 그대로 배어 드러나는

평온한 얼굴을 대했을 때, 거짓 없는 정직한 목소리와

겸손한 자세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의 사람을 만났을 때,


수련잎 위에 앉아 있는 투명하고 고요한 물방울,

일 때문에 걸려온 전화인데도

목소리만 들으면 공연히 즐거워지는

반가운 사람의 전화, 편안하게

농담을 해도 기분 좋게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람의 목소리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어찌 이것뿐이랴.

고개 너머 외딴 집 자갈길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우체부의 오토바이소리,

혼자 사는 할머니가 부탁한

약봉지를 전해주러 가는 우체부의 뒷모습.

내가 실수도 하고 잘못하기도 하는 걸

알면서도 말없이 덮어주고

이해해주는 고마운 사람의 눈길, 한동안 안보이다

다시 나타나 툇마루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다람쥐,


수십 년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의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웃음, 젊은 시인의 첫 시집에

들어 있는 좋은 시 한 편,


여름날의 모진 비바람과 여러 차례의

태풍을 견디고 살아남아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의 성숙한 얼굴빛,

내가 없는 사이에

내 사이버공간을 찾아와 아름다운 음악과

가슴 저미는 글을 남기고 간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발자취,

눈 내린 날 새벽 마당에 찍혀 있는

고라니 발자국, 소나기 내리다 그친 숲의 싱그런 초록,


종신서원을 마치고 나오며

활짝 웃는 수녀님의 환한 얼굴,

밤하늘 너른 마당을 바람이

서늘하게 씻어놓은 뒤 별이란 별

모두 나와 왁자한 날, 메밀밭처럼

하얗게 깔린 별들을 바라보면서

깊어가는 가을 밤. 풀벌레들이 연주하는 교향악,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 도종환 님의 산방일기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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