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빈 강에 서서/류시화

ys형님 2020. 6. 5. 10:19



빈 강에 서서....류시화


날마다 바람이 불었지.

내가 날리던 그리움의 연은

항시 강 어귀의 허리 굽은 하늘가에 걸려 있었고

그대의 한숨처럼 빈 강에 안개가 깔릴 때면

조용히 지워지는 수평선과 함께 돌아서던

그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지.

저무는 강, 그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목숨처럼 부는,

목숨처럼 부대끼는

기억들뿐이었지.


2

미명이다.

신음처럼 들려오는 잡풀들 숨소리

어둠이 뒷모습을 보이면 강바람을 잡고 일어나

가난을 밝히는 새벽 풍경들.

항시 홀로 떠오르는 입산금지의 산영(山影)이

외롭고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슬픔의 시작이었지.


3

다시 저녁.

무엇일까 무엇일까

죽음보다 고된 하루를 마련하며

단단하게 우리를 거머쥐는 어둠,

어둠을 풀어놓으며 저물기 시작한 강,

흘러온 지 오래인 우리의 사랑,

맑은 물 샘솟던 애초의 그곳으로 돌이킬 수 없이

우리의 사랑도 이처럼 저물어야만 하는가

긴 시를 끝의 마지막 인사를 끝내 준비해야만 하는가.

4

바람이 불었다.

나를 흔들고 지나가던 모든 것은 바람이다.

그대 또한 사랑이 아니라 바람이다.

강가의 밤,

그 밤의 끝을 돌아와 불면 끝의 코피를 쏟으며

선혈이 낭자하게 움트는 저 새벽 여명까지도 바람이다.

내 앞에선 바람 아닌 게 없다.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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