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蘭이야기

ys형님 2014. 8. 10. 09:17

 

 

 

(蘭)    -박목월-

이쯤에서 /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蘭을 기르듯 /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바람에
사운대는 저 잎샐 보게

잎새에
실려오는 저 햇빛을 보게

햇빛에
묻어오는 저 향낼 맡게나

이승의
일이사 까마득 잊을 순 없지만

蘭이랑
살다보면 잊힐 날도 있겠지…

 

-신석정(1907~1974)

 

 

 

이름이 란(蘭)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안도현


작은 짐승
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안도현 - 
2007.07.03. 12:38

   

蘭과 詩의 만남

  

나는 돌 그대는 蘭,

자네와 나 사이에

 골짜기가 너무 깊어 만날 수는 없지만

 그대의 蘭 향기 비바람이 전해주네.

                                   < 秋史가 石坡에게 보낸 시>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微塵도 가까이 않고 雨露 받아 사느니라.

 

(嘉藍 李秉岐-난초. 출전:<가람 시조집>(1939))


차가운 난잎은 차라리 먹빛이요

벙긋웃는 난화은 완연한 봄빛이라.

새벽녘 돌부리에선 엷은 안개 스친다.(권상호-난초)


한 손에 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蘭草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蘭香의 소리>

고요한 대지

닭울음 들리고

동창은 밝았다.

개울물 소리에 억새풀 소리

산 넘어 흘러오는 薰風에 그윽한 향기

이 곳은 武陵桃源./

목마른 아침에 이슬을 머금고

동녘 햇살에 생기를 얻는다./

淸雅心, 자연 순응의 謙虛心

無過慾, 忍耐를 배우며

錢香보다 僞香보다

眞香이 좋더라.


<素空>님께

그 무슨 향기이기 이리도 멀리 들려옵니까?

임께도 그 내음 젖어, 주시는 잔에도 함빡 젖어......

蘭草와 더불어 조촐히 닦으신 정한 자리에

진정 속되어 난 키우기 아예 부끄럽습니다.


 

<蘭草>

 

난초는/얌전하게 뽑아 올림 듯 갸름한 잎새가 어여쁘다.

난초는/건들어지게 처진 청수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난초는/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냄새가 난다.

난초는/산에서 살던 놈이라 아모래도 산 냄새가 난다.

난초는/<倪雲林(예운림)>보다도 고결한 성품을 지니었다.

난초는/<陶淵明>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

 

신석정. 전북 부안. ‘朝鮮文學’(1937. 2.)과 ‘촛불’(1939)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