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 이 혜 인 사진작가***허 길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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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小心症) 환자(患者)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詩)가 쌓입니다.가을이 내민 단풍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 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 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 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 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日常)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 는 것을.
13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 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4 ? 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 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서 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 갈때 아무도 그의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와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 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와해 본 적이 있습니까. 15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추 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 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 마지막으로 아껴 두 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이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햇던 당신과 나의 시간 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16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 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17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 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 주십시오. 18 당신은 내 생(生)에 그러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선(線). 그리고 내 생(生)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개의 점(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19 당신이 안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 본 하늘 위 에 착한 새 한 마리 날으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무언(無言)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20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 울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 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21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 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
25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 로 피워 올리는 나의 기도. <나의 사랑이 티없이 단순하 게 하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 게 하십시오.> 26 오늘은 모짜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 어 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 쓸함조차 실컷 맛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 에게 기대를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 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27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 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 겨도 그저 은헤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 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28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 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 굴이 핼쑥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 데도 업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 한 켤레의 고독을 신 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29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 버리는 나의 마 음을 창 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 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 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30 여기 제가 왔읍니다. 언제나 사랑의 원정(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 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사랑의 비법(秘法)을 들려 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더 겸허 하게 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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