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 시인

ys형님 2020. 3. 3. 16:04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 시인


지금은 남의 땅 ㅡ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긴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갑부나게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ㅡ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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